SPYAIR - Orange를 듣고 하이큐 감정선까지 다시 달려본 후기

얼마 전 퇴근길에 플레이리스트를 넘기다가 SPYAIR의 Orange가 다시 나왔는데, 이상하게 첫 소절부터 걸음 속도가 조금 느려지더라고요. 분명 신나는 밴드 사운드인데 마음 한쪽은 살짝 찡해지는 곡이라, 이 노래는 그냥 애니 주제가로만 지나치기엔 얘깃거리가 꽤 많습니다.
특히 하이큐를 봐온 사람이라면 Orange가 주는 감정이 더 선명하게 와요. 경기의 승패보다 오래 남는 건 결국 같이 뛰었던 시간, 서로를 의식하며 성장했던 관계, 그리고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돌아보게 되는 순간들이잖아요. 이 곡은 그 지점을 꽤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의외로 담백했다
SPYAIR 하면 강한 기타 리프, 시원하게 뻗는 보컬, 땀 냄새 나는 청춘 밴드 사운드가 먼저 떠오릅니다. 하이큐와 만났던 이전 곡들도 에너지가 확실했죠. 그런데 Orange는 시작부터 무조건 밀어붙이는 느낌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천천히 꺼내보는 듯한 온도가 있습니다.
물론 곡이 밋밋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후렴으로 갈수록 밴드 사운드가 커지고 감정도 같이 올라가요. 다만 이 곡의 매력은 폭발력보다 여운 쪽에 더 가깝습니다. 경기장 조명이 꺼진 뒤에도 체육관 바닥에 남아 있을 것 같은 발자국, 그런 이미지가 계속 떠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호불호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SPYAIR 특유의 직선적인 질주감을 기대했다면 처음엔 살짝 얌전하게 느껴질 수 있어요. 반대로 하이큐의 긴 시간을 따라온 사람이라면 이 담백함이 오히려 더 세게 꽂힙니다. 너무 울어라, 감동해라 하고 밀어붙이지 않아서 더 좋았습니다.
하이큐 팬에게 Orange가 다르게 들리는 이유
Orange는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과 연결해서 들을 때 감정이 확 살아납니다. 카라스노와 네코마의 관계는 단순한 라이벌 구도가 아니죠. 서로를 이기고 싶지만, 동시에 서로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팀들입니다. 이 복잡한 감정이 노래 안에 자연스럽게 묻어 있습니다.
스포를 피해서 말하자면,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는 누가 몇 점을 따느냐보다 랠리의 호흡입니다. 공 하나가 넘어갈 때마다 두 팀이 쌓아온 시간이 같이 움직여요. 그래서 Orange를 들으면 승리의 환호보다 끝나가는 순간의 아쉬움이 먼저 남습니다. 이게 참 묘합니다. 스포츠물인데, 청춘의 졸업 앨범을 넘기는 기분이 들거든요.
하이큐가 오래 사랑받은 이유도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재 한 명이 모든 걸 해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 자기 한계를 조금씩 밀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니까요. Orange는 그 성장담의 마지막 페이지 근처에서 들려오는 노래처럼 느껴집니다. 밝은데 쓸쓸하고, 힘찬데 어딘가 작별 인사 같아요.
가사와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청춘의 색
제목이 Orange인 것도 꽤 잘 어울립니다. 주황색은 하이큐 팬에게 그냥 색이 아니죠. 카라스노의 팀 컬러를 떠올리게 하고, 동시에 해질녘의 색이기도 합니다. 낮이 끝나가지만 완전히 어둡지는 않은 시간. 이 곡은 딱 그 사이에 서 있습니다.
노래가 말하는 감정도 비슷합니다. 끝났으니 슬프다, 이 정도로 단순하지 않아요. 함께한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이 나를 바꿨고, 그래서 언젠가 멀어져도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사실 스포츠 애니에서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은 우승컵보다 이런 관계의 흔적일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저는 Orange를 들으면서 예능 리뷰할 때 자주 느끼는 감정도 떠올랐습니다. 시즌제 예능이 끝날 때, 출연자들이 마지막 촬영에서 웃고 있는데 보는 사람은 괜히 섭섭한 그 느낌 있잖아요. 드라마든 예능이든 오래 따라간 콘텐츠는 결국 캐릭터와 시청자 사이에도 시간이 쌓입니다. Orange는 그 쌓인 시간을 건드리는 노래입니다.
추천하고 싶은 감상 포인트
이 곡은 한 번만 듣고 판단하기보다 장면을 떠올리며 다시 들을수록 좋아지는 타입입니다. 특히 하이큐를 이미 본 사람과 아직 안 본 사람의 체감이 꽤 다를 거예요. 작품을 모르면 청량한 밴드곡으로 들리고, 작품을 알고 들으면 인물들의 표정이 같이 따라옵니다.
- 첫 감상은 멜로디보다 곡의 온도에 집중하면 좋습니다.
- 후렴에서는 승부의 긴장감보다 지나간 시간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됩니다.
- 하이큐를 봤다면 카라스노와 네코마의 관계를 떠올리며 들을 때 몰입감이 커집니다.
- SPYAIR의 강한 록 사운드를 기대한 사람에겐 살짝 잔잔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근데 저는 이 잔잔함이 Orange의 장점이라고 봅니다. 모든 청춘물이 끝까지 달리기만 하면 보는 사람도 지치거든요. 때로는 숨을 고르고, 뒤돌아보고, 그때 참 뜨거웠지 하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곡은 그 호흡을 만들어줍니다.
호불호는 있지만 오래 남는 곡
Orange가 모두에게 즉시 꽂히는 곡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강한 도입부, 폭발적인 클라이맥스, 귀에 바로 박히는 중독성을 원한다면 이전 SPYAIR 곡들이 더 취향일 수도 있어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땐 예상보다 차분해서 조금 의외였습니다.
그런데 두세 번 듣고 나니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이 노래는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보다 듣고 난 뒤에 더 오래 남아요. 마치 좋은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화면은 끝났는데 인물들이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줍니다.
그래서 SPYAIR - Orange는 하이큐 팬에게는 꽤 다정한 선물 같은 곡이고, 작품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청춘 밴드 음악으로 충분히 매력 있는 곡입니다. 다만 진짜 맛은 역시 이야기를 알고 들을 때 살아납니다. 저는 이런 노래가 좋습니다. 과하게 울리지 않는데,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조용히 크게 울리는 노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