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라스 쉬프를 듣다가 피아노에도 서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드라마를 정주행할 때 저는 큰 사건보다 초반에 스쳐 지나간 말 한마디가 뒤에서 다시 들리는 순간을 좋아해요. 안드라스 쉬프의 피아노를 듣다가도 비슷한 재미를 느꼈습니다. 처음엔 담백해서 그냥 지나친 소리가, 곡이 진행될수록 다른 표정으로 돌아오거든요. 화려한 장면을 기다리기보다 인물의 작은 변화를 따라가는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쉬프의 연주도 꽤 오래 붙잡고 듣게 될지 모릅니다.
크게 말하지 않는데 자꾸 귀가 가는 이유
안드라스 쉬프는 1953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입니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까지 폭넓게 연주하지만, 제가 그의 연주에서 먼저 듣게 되는 건 선율 사이의 관계예요. 오른손이 노래하는 동안 왼손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같은 음형이 두 번째 나올 때 힘이 얼마나 달라지는지에 귀가 갑니다. 드라마로 치면 주인공의 대사만 좇다가 옆 사람의 반응을 발견하는 느낌이죠.
이런 방식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어요. 한 음으로 분위기를 확 뒤집는 연주를 기대했다면 첫인상이 얌전하게 들릴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왜 이렇게 차분하지?’ 싶었어요. 그런데 조금 더 들으니 음을 세게 치지 않고도 긴장을 만드는 대목이 보였습니다. 쉬프의 장점은 늘 조용하다는 데 있지 않아요. 어느 순간 소리가 도드라져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 앞의 평범해 보이는 몇 마디까지 집중해서 듣게 만든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바흐는 한 장면씩 다시 듣고 싶어진다
첫 곡으로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에서 전주곡과 푸가 한 쌍을 골라 듣는 편이 좋았어요. 전주곡에서 리듬의 흐름을 잡고, 이어지는 푸가에서는 먼저 나온 선율이 다른 자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따라가면 됩니다. 익숙한 얼굴이 장면마다 다른 인물과 마주치는 군상극 같달까요. 모든 성부를 한 번에 알아들을 필요는 없어요. 저도 처음엔 맨 위 선율만 듣다가, 다시 틀었을 때 아래쪽 움직임이 들리면서 곡이 새로워졌습니다.
ECM이 발매한 쉬프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두 권의 48개 전주곡과 푸가를 담고 있습니다. 숫자만 보면 정주행 욕심이 생기지만,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숙제처럼 듣기엔 길어요. 한 쌍을 듣고 마음에 남는 부분을 다시 재생하는 편이 제 취향에는 맞았습니다. 빠른 부분에서도 음의 윤곽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느린 부분에서는 다음 음이 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듣는 재미가 있거든요.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좋은 출발점입니다. 처음의 아리아가 지나고 나면 같은 바탕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변주가 이어져요. 예능에서 같은 출연자가 게임을 할 때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때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과 조금 닮았습니다. 다만 변주를 전부 ‘숨은 규칙 찾기’로 들으면 금세 피곤해져요. 어느 변주가 편했고 어느 변주에서 집중이 흐트러졌는지만 기억해도 다음 감상에 충분합니다.
베토벤에서는 긴 호흡이 살아난다
쉬프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은 32곡을 다룹니다. ECM에 따르면 취리히 공연 실황을 녹음한 연주예요. 그래서인지 저는 이 음반을 들을 때 한 악장의 멋진 순간만 잘라 듣는 것보다, 앞 악장에서 생긴 기대가 뒤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따라가게 됩니다. 드라마 한 회의 명장면보다 앞뒤 회차를 함께 봤을 때 인물의 선택이 더 선명해지는 것처럼요.
처음부터 32곡을 차례로 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아는 소나타 한 곡을 고른 뒤, 첫 악장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들어보는 게 더 재밌어요. 같은 곡의 다른 피아니스트 연주와 번갈아 들으면 차이도 빨리 느껴집니다. 어떤 연주는 갈등을 앞쪽으로 끌어오고, 쉬프의 연주는 그 갈등에 이르는 과정이 또렷하게 들릴 때가 있어요. 물론 이건 제 귀에 남은 인상입니다. 베토벤에서 거친 추진력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쉬프가 지나치게 신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내 취향인지 가려보는 세 곡의 순서
쉬프가 궁금한 친구에게 권한다면 바흐의 짧은 전주곡과 푸가 한 쌍,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와 앞부분, 베토벤 소나타 한 곡 순서로 들려주고 싶어요. 바흐에서는 서로 다른 선율을 따라갈 수 있는지, 변주곡에서는 반복이 지루한지 재미있는지, 베토벤에서는 긴 흐름을 붙잡고 싶은지 확인할 수 있거든요. 세 곡이 모두 마음에 들어야 좋은 청자는 아닙니다. 한 곡만 계속 돌려 듣고 싶어져도 이미 취향의 단서는 찾은 셈이에요.
저는 쉬프를 들을 때마다 드라마의 ‘다음 화’를 누르기 직전처럼 잠깐 멈추게 됩니다. 방금 들은 음이 왜 거기 있었는지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요. 큰 반전이 없어도 인물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작품이 있듯, 그의 피아노도 작게 들린 순간이 나중에 오래 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