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원 드라마 세 편을 이어 보니 표정이 먼저 남았다

얼마 전 <산후조리원>을 다시 틀었다가 엄지원의 표정 때문에 한 회를 더 봤다. 회사에서는 뭐든 척척 해내던 사람이 낯선 공간에 들어가자 눈빛부터 흔들린다. 그걸 보고 나니 <작은 아씨들>과 <독수리 5형제를 부탁해!>에서의 엄지원도 다시 궁금해졌다. 세 작품의 분위기는 꽤 다른데, 인물이 처한 상황을 말보다 먼저 얼굴에 담아낸다는 점은 닮았다.
이 글은 각 작품의 출발점과 관전 포인트만 이야기한다. 뒤늦게 정주행을 시작하는 재미를 뺏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 취향도 솔직히 적어두면, 나는 사건이 빠르게 터지는 장면보다 인물이 잠깐 말을 고르는 순간을 좋아한다. 그래서 엄지원의 연기를 볼 때도 대사 다음에 남는 표정을 자꾸 보게 된다.
산후조리원에서는 잘하던 사람이 서툴러진다
tvN <산후조리원>에서 엄지원이 맡은 오현진은 회사의 최연소 상무다. 그런데 출산 뒤 들어간 조리원에서는 최고령 산모가 된다. 같은 사람인데 장소가 바뀌자 익숙했던 규칙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 이 설정부터 재밌다. 일을 잘하는 능력과 처음 부모가 되는 일은 별개라는 걸 현진이 매번 몸으로 겪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현진이 애써 침착한 척하는 모습이 웃기다. 아기를 돌보는 일도, 다른 산모들과 어울리는 일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데 자꾸 능숙하게 해내고 싶어 한다. 엄지원은 그 마음을 큰 소리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잠시 굳는 얼굴,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불안해 보이는 눈이 더 기억에 남았다. 박하선이 연기한 조은정과 마주할 때는 두 사람의 다른 성격이 부딪히며 조리원 안의 분위기도 한층 살아난다.
이 작품은 8부작이라 몰아보기에 부담이 적다. 코미디의 박자가 좋아 한 회가 금방 가지만, 웃음 뒤에 출산과 돌봄, 복직에 대한 걱정이 따라온다. 다만 과장된 상황극이 취향에 안 맞으면 초반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낯설 수 있다. 그래도 현진을 완벽한 엄마로 포장하지 않는 점이 나는 좋았다. 마음이 복잡한 날 짧은 드라마를 찾는다면 가장 먼저 손이 갈 작품이다.
작은 아씨들에서는 친절한 얼굴도 의심하게 된다
<작은 아씨들>은 가난하게 자란 세 자매가 부유하고 힘 있는 가문과 얽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엄지원은 그 가문의 원상아를 연기한다. 이 작품에서 내가 재미있게 본 건 인물이 무슨 말을 했느냐보다 그 말을 어떤 얼굴로 건넸느냐다. 상아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하는 장면에도 묘한 긴장이 남는다.
<산후조리원>의 현진을 보고 바로 이 작품을 틀면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현진의 표정에서는 속마음이 새어 나오는 편인데, 상아의 표정은 오히려 속을 가리는 듯하다. 상대를 편하게 대하는 말투와 쉽게 읽히지 않는 시선이 한 장면 안에 같이 놓인다. 자매들의 선택을 따라가다가도 상아가 등장하면 대화의 주도권이 어디로 옮겨 가는지 보게 된다. 구체적인 사건을 모르고 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부분이다.
대신 이 드라마는 화면 속 단서와 인물 관계를 챙겨 보는 쪽이 더 재밌다. 잠깐 한눈팔았다가 앞 장면을 되돌린 적도 있었다. 촘촘한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반갑겠지만, 퇴근 뒤 가볍게 웃고 싶은 날에는 피곤할 수 있다. 엄지원의 연기를 보려고 시작해도 세 자매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가는 작품이다.
독수리 5형제를 부탁해!에서는 사람을 붙잡는 힘이 보인다
KBS <독수리 5형제를 부탁해!>에서 엄지원은 마광숙이다. 결혼한 지 열흘 만에 남편을 떠나보낸 뒤 독수리술도가와 남겨진 가족들을 마주한다. 시작부터 버거운 사연이지만 광숙은 그저 슬픔을 견디기만 하는 인물이 아니다. 일이 생기면 나서고, 할 말도 한다. 가족 드라마에서 인물이 사건을 끌고 가는 맛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 작품의 광숙은 <작은 아씨들>의 상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붙든다. 감정을 숨기는 대신 드러내고, 주변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관계를 만들어 간다. 술도가의 형제들이 저마다 사정을 안고 있어 이야기가 광숙 혼자에게만 머물지도 않는다. 함께 밥 먹고 말다툼하는 장면이 쌓일수록 이 사람들이 앞으로 서로를 어떻게 대할지 궁금해진다.
호불호는 분명할 것 같다. 주말 가족극 특유의 여러 갈래 이야기가 이어져 한두 회 만에 쭉 달리는 속도감은 덜하다. 나는 세 작품을 연달아 보면서 그 느린 호흡이 오히려 반가웠다. 광숙이 누군가를 챙기는 장면에서도 무조건 씩씩하기만 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때 엄지원의 얼굴을 보면 이 인물이 감당하는 무게가 조금 더 실감 난다.
세 작품 중 무엇부터 볼까
시간이 많지 않다면 8부작 <산후조리원>부터 권하고 싶다. 웃다가 마음이 찡해지는 흐름이 좋아서 엄지원의 연기에 입문하기에도 편하다. 긴장감을 원하면 <작은 아씨들>, 인물들이 오래 어울리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독수리 5형제를 부탁해!> 쪽이다. 같은 배우를 따라가도 고르는 작품에 따라 그날의 시청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내게 가장 오래 남은 건 오현진의 당황한 얼굴이지만,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은 볼 때마다 달라진다. 어떤 날은 원상아의 미소가 섬뜩하게 기억나고, 어떤 날은 마광숙이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엄지원이 연기한 인물들은 성격도 이야기도 다르다. 그 차이를 따라 세 편을 이어 보는 시간이 꽤 즐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