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작곡가 이름을 따라 드라마 음악을 다시 들어봤더니 보인 것들

엔딩 크레딧을 멈춰 세우는 이름
얼마 전 드라마를 몰아보다가 엔딩 크레딧을 그냥 넘기지 못한 적이 있다. 보통은 다음 회차 버튼을 누르는 손이 더 빠른데, 그날은 배경음악이 묘하게 장면을 오래 붙잡고 있어서 이름을 확인하게 됐다. 그때 눈에 들어온 키워드가 바로 이현정 작곡가였다.
사실 드라마나 예능을 볼 때 작곡가 이름까지 챙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배우, 작가, 연출자는 비교적 빨리 기억되지만 음악 쪽 스태프는 화면 뒤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주행을 오래 하다 보면 이상하게 같은 장면도 음악에 따라 온도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느끼게 된다. 16부작 드라마라면 회차마다 최소 60분, 전체로 보면 16시간 안팎을 함께 가는 감정의 길잡이가 음악인 셈이다.
이현정 작곡가라는 이름을 따라가며 느낀 재미는 화려한 OST 타이틀곡보다 장면 안쪽에 깔리는 음악을 다시 듣게 된다는 점이었다. 주인공이 아무 말 없이 걷는 장면, 예능에서 멤버들이 어색하게 웃는 순간, 갈등이 터지기 직전의 짧은 침묵 같은 데서 음악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한다.
드라마에서 음악은 감정의 자막처럼 움직인다
드라마 음악을 볼 때 내가 제일 먼저 보는 건 멜로디가 예쁜지보다, 장면보다 앞서가지는 않는지다. 너무 감정을 먼저 외쳐버리면 배우가 쌓아 올린 표정이 얇아 보일 때가 있다. 반대로 음악이 너무 얌전하면 중요한 장면이 그냥 지나간다. 좋은 배경음악은 딱 한 발 뒤에서 따라오다가, 필요한 순간에만 살짝 등을 미는 쪽에 가깝다.
이현정 작곡가를 키워드로 놓고 드라마 음악을 떠올리면, 나는 특히 인물의 감정을 단번에 설명하기보다 분위기를 만들어두는 방식에 눈길이 간다. 예를 들어 로맨스 장면에서도 바로 설레는 선율을 크게 올리기보다, 피아노나 스트링을 얇게 깔아두면 시청자는 둘 사이의 말보다 공기를 먼저 읽게 된다. 이게 은근히 세다.
정주행할 때는 이 차이가 더 잘 보인다. 1회에서는 그냥 예쁜 음악처럼 들렸던 테마가 8회쯤 가면 특정 인물의 상처와 연결되고, 14회쯤에는 같은 멜로디가 전혀 다른 감정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음악을 신경 쓰며 보면 복선이 대사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스포 없이 체크하기 좋은 감상 포인트
- 같은 멜로디가 초반과 후반에 어떤 분위기로 반복되는지 듣기
- 고백, 이별, 화해 장면에서 음악이 먼저 치고 나오는지 아니면 늦게 들어오는지 보기
- 인물의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 배경음악이 감정을 얼마나 채우는지 느껴보기
- 엔딩 직전 음악이 다음 회차를 누르게 만드는 힘이 있는지 확인하기
예능 음악은 웃음의 타이밍을 만든다
드라마 음악이 감정의 자막이라면, 예능 음악은 리액션의 편집점에 가깝다. 같은 침묵도 어떤 음악이 깔리느냐에 따라 민망함이 되기도 하고, 웃긴 상황이 되기도 하고, 괜히 짠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예능을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음악과 효과음의 타이밍에 꽤 민감해진다.
특히 관찰 예능이나 여행 예능에서는 음악이 출연자의 이미지를 은근히 만든다. 누군가 서툴게 요리하는 장면에 밝고 통통 튀는 음악이 붙으면 귀여운 실수가 되고, 같은 장면에 잔잔한 음악이 붙으면 진심 어린 노력처럼 보인다. 이 차이는 작지만, 10회 이상 누적되면 캐릭터 해석까지 바꿔놓는다.
그래서 이현정 작곡가 같은 이름을 찾아보게 되는 건 단순한 팬심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프로그램에 설득됐는지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웃긴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음악이 반 박자 먼저 웃을 준비를 시켜놨던 거다. 솔직히 이걸 한번 의식하면 예능을 볼 때 편집과 음악이 따로 놀지는 않는지 자꾸 보게 된다.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도 분명 있다
물론 음악이 좋다고 해서 모든 장면이 살아나는 건 아니다. 어떤 드라마는 음악이 너무 친절해서 시청자가 느낄 틈을 덜어버린다. 슬픈 장면마다 비슷한 톤의 피아노가 나오거나, 긴장 장면마다 같은 방식으로 현악기를 몰아치면 후반부에는 피로감이 생긴다. 정주행에서는 이 피로가 더 빨리 온다.
반대로 음악을 아끼는 작품은 초반에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인물의 서사가 쌓인 뒤에는 그 절제가 오히려 힘을 발휘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 쪽을 더 좋아한다. 감정을 떠먹여주는 음악보다, 내가 장면을 따라가다가 뒤늦게 멜로디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이현정 작곡가라는 키워드로 음악을 듣는 재미도 여기에 있다. 이름 하나를 붙잡고 작품을 보는 순간, 시청 방식이 조금 달라진다. 배우의 표정만 보던 장면에서 악기 구성을 듣게 되고, 대사에 집중하던 장면에서 침묵의 길이를 보게 된다. 이건 드라마를 두 번째 볼 때 특히 쏠쏠하다.
다음 정주행 때는 크레딧을 조금만 늦게 넘기게 된다
드라마와 예능을 오래 보다 보면 취향이 점점 세분화된다. 어떤 사람은 빠른 전개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캐릭터 관계성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대사 맛으로 작품을 고른다. 나는 거기에 음악 취향도 꽤 큰 비중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이현정 작곡가를 검색하고, 관련 음악을 의식하며 다시 장면을 보면 작품이 조금 다르게 열린다. 스포를 피하면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감상법이라는 점도 좋다. 줄거리를 미리 알 필요 없이, 그저 한 장면이 왜 오래 남았는지 음악 쪽에서 한번 더 확인하면 된다.
다음에 드라마나 예능을 몰아볼 때 엔딩 크레딧을 바로 넘기지 않고 5초만 더 바라보면, 의외로 취향의 출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이현정 작곡가라는 이름이 그런 식으로 남았다. 화면 뒤에서 조용히 분위기를 잡아주는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면, 정주행의 재미가 생각보다 한 칸 더 깊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