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란도트 정주행하듯 봤더니 사랑보다 더 크게 들린 잔혹한 질문들

처음엔 유명한 아리아 하나만 알고 봤다
얼마 전 공연 영상으로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다시 봤는데, 솔직히 처음엔 ‘네순 도르마’ 들으려고 틀었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오페라를 잘 몰라도 멜로디는 한 번쯤 들어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막상 끝까지 보니, 이 작품은 단순히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로만 넘기기엔 꽤 독하고 차갑다. 무대는 화려하고 음악은 웅장한데, 이야기 안쪽에는 권력, 공포, 집착, 희생이 계속 부딪힌다.
배경은 고대 중국 베이징이다. 공주 투란도트는 구혼자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고, 맞히지 못하면 처형한다. 이미 여러 남자가 목숨을 잃은 상태에서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가 등장한다. 그는 투란도트를 보고 사랑에 빠지고, 주변의 만류에도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굉장히 동화적인 설정인데, 실제 감상은 훨씬 날이 서 있다.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죽음의 게임에 뛰어드는 남자, 자신의 상처를 이유로 타인의 목숨을 건 여자가 한 무대에 서 있기 때문이다.
투란도트는 차가운 악역일까, 상처 입은 권력자일까
이 작품에서 제일 흥미로운 인물은 역시 투란도트다. 첫인상은 냉혹하다. 구혼자들을 시험하고, 실패하면 죽게 만든다. 관객 입장에서는 쉽게 좋아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그런데 작품은 그녀를 완전히 단순한 악역으로만 두지 않는다. 투란도트는 과거 조상인 로우링 공주가 이방 남자에게 능욕당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기억을 안고 있다. 그래서 남자를 믿지 않고, 결혼을 굴복처럼 여긴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의 잔혹함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호불호가 갈린다. 어떤 관객은 투란도트를 비극적 피해 의식에 갇힌 인물로 볼 수 있고, 어떤 관객은 그냥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폭군으로 볼 수 있다. 저는 둘 다 맞다고 느꼈다. 상처가 있다는 사실과, 그 상처로 남을 해치는 선택은 별개니까. 오히려 이 애매함 때문에 투란도트가 오래 남는다. 착한 여주인공도 아니고, 완전히 이해 가능한 피해자도 아니다.
칼라프의 사랑은 로맨스보다 집착에 가깝다
칼라프도 만만치 않다. 그는 투란도트를 보자마자 강렬하게 끌리고, 아버지 티무르와 시녀 류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친다. 극 안에서는 운명적 사랑처럼 밀어붙이지만, 지금 감각으로 보면 꽤 위험한 남자다. 상대의 마음을 아는 단계가 아니라 이미지에 반한 상태에 가깝고, 그 감정 하나로 주변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뜨린다.
특히 수수께끼를 모두 맞힌 뒤 칼라프가 투란도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맞혀보라고 역제안을 하는 장면은 긴장감이 좋다. 세 가지 수수께끼가 끝났는데도 게임이 끝나지 않는다. 사랑을 증명한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시험이 생긴다. 여기서 작품은 로맨스라기보다 자존심 대결처럼 보인다. 투란도트는 지지 않으려 하고, 칼라프는 굴복시키려 한다. 두 사람 모두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만, 무대 위에서 먼저 보이는 건 욕망과 승부욕이다.
류가 등장하면 작품의 온도가 달라진다
사실 감정적으로 가장 크게 흔드는 인물은 류다. 류는 칼라프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보답받지 못한다. 그래도 눈먼 티무르를 돌보고, 칼라프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고문을 견딘다. 이 지점에서 투란도트의 차가움과 류의 헌신이 강하게 대비된다. 그래서 많은 관객이 주인공 커플보다 류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류의 희생은 아름답게 연출되지만, 동시에 불편하기도 하다. 왜 가장 순하고 따뜻한 인물이 가장 큰 고통을 떠안아야 할까. 오페라에서 비극적 여성 인물이 자주 맡는 역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류의 노래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을 만든다. 투란도트와 칼라프가 거대한 상징처럼 움직인다면, 류는 실제로 숨 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 투란도트: 두려움과 권력을 갑옷처럼 두른 인물
- 칼라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위험을 밀어붙이는 인물
- 류: 가장 약해 보이지만 감정의 중심을 붙잡는 인물
- 티무르: 몰락한 권력과 늙은 슬픔을 보여주는 인물
관전 포인트는 음악보다 감정의 충돌이다
물론 음악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다. 네순 도르마는 3막에서 칼라프가 부르는 아리아로, 밤새 누구도 잠들지 못하는 상황과 그의 승리를 향한 확신이 겹친다. 이 곡 하나만으로도 작품을 볼 이유는 충분하다. 다만 직접 이어서 보면, 유명한 아리아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히트곡이 아니라 앞선 긴장과 공포를 받아내는 장면이라는 게 더 잘 보인다.
무대 연출도 중요한 포인트다. 투란도트는 대규모 합창, 군중 장면, 궁정의 압도감이 크게 작동하는 작품이다. 궁전의 차가운 규모가 커질수록 개인의 감정은 더 작고 외로워진다. 그래서 영상으로 볼 때도 무대 디자인을 유심히 보게 된다. 황금빛과 붉은색이 강한 연출은 권력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푸른빛이나 흰빛을 강조한 연출은 투란도트의 냉기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스포를 피하고 싶은 관객에게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마지막 전개를 미리 자세히 찾아보지 않는 쪽이 낫다. 이 작품은 수수께끼의 답 자체보다, 답을 맞힌 뒤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특히 류가 극 중반 이후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보면 감정의 충격이 줄어들 수 있다. 줄거리 요약만 보고 넘기기보다는, 최소한 2막 후반부터 3막 초반까지는 흐름으로 보는 게 좋다.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취향을 조금 탄다
투란도트는 입문용 오페라로 자주 언급되지만, 저는 무조건 편하게 볼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악은 굉장히 직관적이고 장면도 크다. 그래서 처음 오페라를 보는 사람도 지루함을 덜 느낄 수 있다. 반면 인물의 감정선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거칠고, 특히 마지막의 급격한 변화는 납득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왜 갑자기?’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래도 한 번쯤 볼 가치는 충분하다. 화려한 스케일, 귀에 남는 선율, 선명한 캐릭터 구도 덕분에 감상 후에 할 이야기가 많다. 저는 보고 나서 투란도트보다 류가 더 오래 남았고, 칼라프의 자신감은 멋있다기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작품은 로맨스의 승리담이라기보다,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여러 얼굴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무대로 기억된다. 찬란한 음악 뒤에 남는 찜찜함까지 포함해서, 투란도트는 꽤 오래 곱씹게 되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