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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룡 드라마를 다시 봤더니 조용한 장면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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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룡 드라마를 다시 봤더니 조용한 장면이 남았다

얼마 전 옛 드라마 장면을 이어 보다가 이재룡에게 자꾸 눈이 갔다. 큰소리로 분위기를 휘어잡는 순간보다, 상대의 말을 듣고 잠깐 표정이 바뀌는 순간이 더 오래 남았다. 이재룡의 출연작을 따라가면 의사, 상인, 왕처럼 직업도 시대도 다른 인물을 만난다. 그런데 세 작품을 붙여 보니 공통으로 보이는 게 있었다. 자기 자리에선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그 결정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야기의 중요한 반전은 피하고, 정주행할 때 눈여겨볼 부분만 골랐다.

종합병원에서는 의사의 실력보다 태도가 먼저 보인다

1994년 드라마 <종합병원>에서 이재룡이 맡은 김도훈은 환자를 대하는 마음이 먼저 드러나는 전공의다. 병원 드라마 하면 긴박한 처치 장면부터 떠올리기 쉬운데, 이 작품에선 의사들이 환자와 동료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볼 만하다. 김도훈은 옳다고 믿는 일이 있을 때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쉽게 넘기지 못한다. 반듯한 인물인데 마냥 편하게만 보이지는 않는 이유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2008년 <종합병원 2>로 이어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MBC의 작품 소개대로, 전공의였던 김도훈은 후배들을 맞는 의사가 된다. 같은 인물을 다시 보는 재미가 단순히 ‘얼마나 성공했나’에 있지는 않다. 젊은 시절 중요하게 여기던 마음을 책임이 커진 자리에서도 지키는지 살피게 된다. 예전 작품을 먼저 보면 후속작에서 후배들을 바라보는 김도훈의 시선이 조금 다르게 읽힌다.

다만 요즘 의학 드라마의 빠른 사건 전개를 기대하면 호흡이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의료 현장의 묘사도 제작 당시의 드라마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나는 사건 하나를 빨리 해결하는 장면보다, 의사들이 서로 다른 판단을 내놓고 그 무게를 감당하는 장면에서 더 붙잡혔다.

상도에서는 거래가 끝난 뒤 표정을 보게 된다

<상도>의 임상옥은 이재룡을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역할이다. MBC 등장인물 소개에서도 그를 장돌뱅이 신분에서 출발해 거상이 되는 인물로 설명한다. 처음엔 성공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계속 보다 보면 관심이 돈의 액수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옮겨 간다. 손해를 피하고 싶은 마음, 신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부딪칠 때 이재룡의 얼굴에 망설임이 남는다.

상대 상인인 박주명은 이순재가 맡았다. 두 사람이 맞서는 장면은 누가 말로 이겼는지만 보면 아깝다. 거래 조건이 오간 뒤 임상옥이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한발 물러서는 듯하다가 무엇을 고집하는지 지켜보면 훨씬 재미있다. 장사 이야기인데 사람 사이의 힘겨루기가 또렷해서, 나는 시장 장면을 궁중 정치극 보듯 보게 됐다.

호불호도 분명하다. 인물의 일대기를 길게 따라가는 시대극이라 빠른 전개에 익숙하면 비슷한 갈등이 반복된다고 느낄 수 있다. 반면 작은 거래가 다음 관계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보는 사람이라면 길이가 장점이 된다. 특히 임상옥을 처음부터 완성된 인물로 여기지 않고 보면, 선택이 쌓이면서 달라지는 맛이 있다. MBC 연기대상 기록에는 이재룡이 이 작품으로 2002년 연속극 부문 남자 최우수상을 받은 사실도 남아 있다.

수백향에서는 왕의 말보다 아버지의 얼굴이 남는다

<제왕의 딸, 수백향>에서 이재룡은 무령대왕을 맡았다. 앞의 두 작품에서 직업과 신념이 인물을 움직였다면, 여기서는 왕이라는 자리와 가족을 향한 감정이 팽팽하게 맞선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그 어긋남이 이 인물을 보는 재미다.

무령대왕의 장면에서는 말의 내용만 따라가기보다 그 말을 꺼내기 전 잠깐의 침묵을 보는 편이 좋았다. 궁 안에서는 누구나 속내를 전부 내보일 수 없고, 왕은 더 그렇다. 이재룡은 단호한 어조를 쓰면서도 얼굴 한쪽에 걱정을 남긴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인물인데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가족 관계와 왕실의 사연이 얽혀 있어서 등장인물 이름이 처음엔 헷갈릴 수 있다. 설난과 설희, 명농과 진무가 각각 무령대왕과 어떤 거리에서 출발하는지만 기억해도 초반 흐름을 따라가기 한결 편하다. 이 글에선 관계가 바뀌는 계기나 뒤의 선택은 적지 않겠다. 그 부분은 직접 볼 때 감정이 가장 크게 움직인다.

세 작품을 어떤 순서로 보면 좋을까

이재룡의 연기를 가볍게 맛보고 싶다면 <종합병원>부터 권하고 싶다. 김도훈이라는 인물의 장점이 비교적 빨리 보이고, 마음에 들면 <종합병원 2>까지 이어 갈 이유도 생긴다. 긴 이야기에 푹 잠기고 싶다면 <상도>가 맞다. 거래 장면의 긴장을 좋아하는지 초반에 감이 올 것이다. 가족을 향한 애틋함과 궁중극의 갈등을 좋아한다면 <제왕의 딸, 수백향> 쪽이 더 잘 맞는다.

셋을 나란히 놓으면 이재룡이 늘 비슷한 사람을 연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도훈은 눈앞의 환자와 후배를 보고, 임상옥은 거래 상대와 그 뒤의 관계를 재고, 무령대왕은 한 사람을 아끼는 마음과 왕의 책임 사이에서 버틴다. 시선이 향하는 곳이 다르니 같은 침묵도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그런 차이를 발견하는 재미 때문에, 이재룡이 나오는 오래된 드라마를 한 편 더 누르게 된다.

이재룡 드라마를 다시 봤더니 조용한 장면이 남았다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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