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WBC 8강 자축을 보며 그날을 다시 봤다

얼마 전 한국과 호주의 WBC 경기를 다시 보다가, 마지막 아웃 하나를 앞두고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점수만 보면 여유 있는 승리처럼 보이는데, 그날은 한 점의 무게가 평소와 달랐다. 경기가 끝난 뒤 박찬호가 도쿄돔에서 8강 진출을 자축한 사진을 올린 것도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졌다. 오래 야구를 지켜본 사람이 후배들의 순간을 함께 기뻐하는 장면이었으니까.
이 글에는 2026 WBC 한국과 호주의 조별리그 최종전 결과와 주요 장면이 나온다. 그 경기를 아직 볼 생각이라면 여기서 잠깐 멈추는 편이 좋다. 이후 8강 경기의 결과는 다루지 않는다.
7대 2인데도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한국은 3월 9일 도쿄돔에서 호주를 7대 2로 이겼다. 그런데 이 경기는 그냥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경기가 아니었다. 8강에 가려면 5점 차 이상으로 이기면서 실점도 2점 이하로 묶어야 했다. 최종 점수가 딱 그 조건에 걸쳐 있다. 한 점을 덜 냈거나 한 점을 더 내줬다면 환호의 주인공이 달라졌을 수 있다는 뜻이다.
드라마로 치면 시청자가 이미 주인공의 목표를 알고 보는 마지막 회 같았다. 득점할 때마다 시원했지만 곧바로 ‘이 점수면 충분한가’를 계산하게 된다. 호주가 따라붙자 점수 차가 다시 좁아졌고, 한국은 9회에 귀한 한 점을 보탰다. 야구를 평소에 챙겨 보지 않는 사람도 그날만큼은 전광판 숫자가 왜 중요한지 금방 알 수 있었을 듯하다.
MLB 경기 기록을 보면 문보경은 2회 투런 홈런을 포함해 4타점을 올렸고, 안현민은 9회 희생플라이로 일곱 번째 점수를 만들었다. 문보경의 장타가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면 안현민의 타구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한 장면이었다. 특히 9회 득점은 이미 앞서고 있는 팀이 쐐기를 박은 정도로 보기 어렵다. 8강 진출 조건을 다시 채운 한 점이었기 때문이다.
박찬호의 자축이 유난히 뭉클했던 이유
박찬호는 경기 당일 도쿄돔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대표팀 후배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공개된 사진에는 김선우와 정준하 등 함께 경기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스타뉴스가 전한 그의 글에서 눈에 들어온 건 후배들이 포기하지 않고 어려운 결과를 만들었다는 취지의 대목이다. 승리 자체보다 그 승리에 도착한 과정을 먼저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찬호에게 WBC는 남의 추억이 아니다. 그는 2006년 대회에 선수로 뛰었고, 한국 야구가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던 시기를 몸으로 겪었다. 그러니 이번 8강 진출을 축하하는 말에는 선배 선수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겹친다. 2009년 이후 17년 만에 다시 8강에 오른 순간이니, 팬들보다 시간을 조금 더 길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마음을 우리가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현장에서 함께 웃고 후배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장면의 온도는 충분히 전해진다.
솔직히 박찬호의 말은 늘 뜨겁다. 그 열기가 좋을 때도 있고, 조금 벅차게 들릴 때도 있다. 이번에는 달랐다. 진출 조건을 놓고 한 이닝씩 마음을 졸인 직후라, 큰 목소리의 축하가 오히려 그날의 관중석과 잘 어울렸다. 차분한 분석보다 먼저 환호가 나와야 하는 순간도 있으니까.
다시 볼 때 눈여겨볼 장면은 따로 있다
경기를 복기한다면 홈런 장면만 이어 보는 것보다 점수 차가 바뀌는 흐름을 따라가는 편을 추천한다. 2회 문보경의 투런 홈런으로 출발하고, 5회와 8회 호주의 득점 뒤에는 한국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계산해 보면 좋다. 그러면 9회 안현민의 희생플라이가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는지 선명해진다. 단순한 추가점이 아니라 경기의 목표를 되찾은 점수였으니까.
또 하나는 선수들의 표정이다. 화면에는 숫자가 남지만, 조건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의 긴장은 몸에 남는다. 마지막 수비까지 집중한 선수들과 승리가 확정된 뒤 풀리는 표정을 이어서 보면 이 경기를 둘러싼 압박이 더 잘 보인다. 이정후의 수비 장면도 빼놓기 아깝다. 점수를 내는 장면만큼, 이미 만든 점수 차를 지키는 플레이가 중요했던 날이다.
8강 자축을 어디까지 기뻐할 수 있을까
호불호가 갈릴 지점도 있다. 8강 진출을 크게 자축하기엔 한국 야구에 더 높은 기대를 거는 팬이 많다. 7대 2라는 결과만 떼어 놓으면 조별리그 한 경기 승리에 들뜬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 시선도 이해한다. 과거의 성적을 기억할수록 8강에서 만족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2013년, 2017년, 2023년에는 조별리그를 넘지 못했다. 이번에는 까다로운 조건을 실제 경기에서 채우며 다음 라운드로 갔다. 부족한 점을 따져 보는 일과 그날의 성취를 기뻐하는 일은 동시에 가능하다. 박찬호의 자축을 보며 내가 떠올린 것도 바로 그 간격이었다. 냉정한 평가는 다음 경기를 준비할 때 필요하고, 마지막 아웃 직후의 환호는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다.
나는 그날을 ‘한국 야구가 돌아왔다’는 선언으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선수들이 끝까지 필요한 점수를 만들고 지켜서, 오랜만에 함께 환호할 시간을 벌어낸 경기로 기억하고 싶다. 도쿄돔에서 웃던 박찬호의 사진도 그 시간의 한 컷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